원숭이 바이러스와 인간 면역체제 간의 끈질긴 싸움
'구식무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 된 인간몸 방어체제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앨리스, 문득 아무리 달려도 주위 풍경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붉은 여왕을 향해 가뿐 숨을 들이쉬며 물어본다.“이상해요. 제가 있던 세상에서는, 이렇게 빨리 뛰면 보통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선 왜 주위 풍경들이 그대로죠?”“거긴 느려 터진 세상인가 보군.” 여왕이 대답한다. “여기에선 보다시피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뛰어야 제자리에 머무를 수 있단다. 만일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 두 배로 빨리 뛰어야만 해!”출처 /Nature: http://www.nature.com/news/2009/091209/ full/news.2009.1134.html |
전세계 HIV 감염 지도. 출처/ UNAIDS Report on the Global AIDS Epidemic 2010 |
인간 면역체제와 SIV 간의 치열한 싸움HIV는 오래 전부터 원숭이면역결핍 바이러스, 즉 SIV(Simian immunodeficiency virus)의 형태로 원숭이, 침팬지 등에 존재했던 바이러스다. 수십만 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바이러스가 인간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100여 년 전 일이며2), 이렇게 많은 생명을 앗아가기까지는 고작 20여 년이 걸렸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하고 빠르며 치명적인 적을 만났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완치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생체의 고유한 방어 시스템과 원숭이의 SIV 사이에서는 그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어째서 수십만 년 간 SIV로부터 우리 몸을 지켜오던 인체내 방어막이 갑작스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인간의 몸 안에는 유전체(게놈)에 포함되어 우리가 자연스럽게 지니고 태어나는 두 가지의 방어 무기가 있다. 첫번째는 APOBEC3s란 이름을 지닌 유전자다. APOBEC3s는 HIV가 침입하면, HIV의 핵심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체내에 침입한 HIV의 복제를 막는 역할을 한다.3)두번째는 BST2, CD317, HM1.24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다가 최근에 그 기능이 좀더 명확히 보고됨과 동시에 테터린(Tetherin)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단백질이다. HIV는 레트로바이러스(아래 용어 설명)의 한 종류로서, 우리몸의 면역 세포 안에 침입해 자신의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에 주입하여 오염시킨 다음, 숙주세포로 하여금 HIV 복제 바이러스를 만들게 하는 방식으로 체내에 전파된다. 이렇게 막 복제된 HIV가 다른 면역세포를 공격하기 위해 밖으로 빠져 나오려는 순간, 이를 못 나가게 붙잡는 단백질이 바로 테터린이다. 테터린은 HIV뿐 아니라 같은 레트로 바이러스에 속한 에볼라 바이러스, 인플렌자A 바이러스 등에도 반응하는 것이 밝혀진바 있다.4)
테터린이 레트로바이러스를 호스트 세포막에 결박한 모습. 그림 출처/ 미국 예일대학교 시옹연구실 The Xiong Laboratory at YALE UNIVERS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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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정교한 바이러스에 맞선 싸움SIV는 인간에게 침투하기 위해 80만년 이상을 기다린 셈이다. 그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았던 인간의 방어막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SIV가 HIV라는 이름을 얻으며 사람 몸에 스며든 것은 알고 보니 아주 최근에 발생한 일이다. 돌아보면, 제너의 실험 이후에 파스퇴르가 ’백신‘이란 이름을 붙인 뒤 인간에게 면역학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도 겨우 1880년일이다. 수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길고 긴 진화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사람이 스스로 백신을 만들어 바이러스를 통제하기 시작한 때와 SIV가 인간을 향한 공격을 시작한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셈이다.요즘 나는 HIV 발현 이유를 진화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치료의 실마리를 찾는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데, 연구를 하다보면 간혹 HIV라는 존재가 혹시 지적 능력을 통해 스스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려는 인간을 견제하고자 만들어진, 차원 높은 자연의 섭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리고 이런 사색은, 신이 만든 바이러스라 불릴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HIV라는 존재를, 백신을 만들어낸 우리의 궁극적 무기인 ’지적 능력‘을 통하여 끝내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붉은 여왕의 전쟁에서 과연 인류는 HIV를 끝내 이겨낼 수 있을까?------------------------------------------------------------------------1) http://www.unaids.org/globalreport/2) Worobey, M., Telfer, P., Souquiere, S.,Hunter,M.,Coleman,C.A.,Metzger,M. J., Reed, P., Makuwa, M., Hearn,G., Honarvar, S., Roques, P., Apetrei,C., Kazanji, M., and Marx, P. A.(2010). Island biogeography reveals the deep history of SIV. Science 329, 14873) Madani, N., and Kabat, D. (1998).An endogenous inhibitor of human immunode?ciency virus in human lymphocytes is overcome by the viral Vif protein. J. Virol. 72, 10251-10255.4) Neil, S. J., Zang, T., and Bieniasz, P. D. (2008). Tetherin inhibits retrovirus release and is antagonized by HIV-1 Vpu. Nature 451, 425-430.5) Simon, J. H., Gaddis,N. C., Fouchier, R.A., and Malim, M. H. (1998). Evidence for a newly discovered cellular anti-HIV-1 phenotype. Nat. Med. 4, 1397-1400.6) Varthakavi, V., Smith, R. M., Bour, S. P., Strebel, K., and Spearman, P (2003). Viral protein U counteracts a human host cell restriction that inhibits HIV-1 particle production. Proc. Natl. Acad. Sci. U.S.A. 100, 15154-15159.7) Sauter, D., Specht, A., and Kirchhoff, F. (2010). Tetherin: Holding On an. Cell. 141, 392-398
도쿄의과치과대학교에서 분자생명정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대학에서 특임조교를 거쳐 지금은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메일 : scienceon@hani.co.kr 트위터 : @whereifrom 블로그 : taehojo.tistory.com
과학자와 기자가 만드는 뉴스와 비평 ‘사이언스 온’http://scienceon.hani.co.kr/4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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